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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카사노미야 도모히토 친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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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카사노미야 도모히토 친왕은 일본 황족으로, 1946년에 태어나 2012년에 사망했다. 가쿠슈인 대학 정치학사 학위를 받았으며,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유학했다. 털보 전하라는 애칭으로 불렸으며, 사회복지, 스포츠 등 다양한 분야에서 공적 활동을 펼쳤다. 특히 여계 천황에 반대하는 입장을 표명하여 일본 황위 계승 문제에 대한 논쟁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16차례의 암 수술을 받는 등 질병으로 고통받았으며, 저술 활동과 방송 출연도 활발하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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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카사노미야 도모히토 친왕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도모히토 친왕 (2003년)
2003년 3월 7일, 다카나와 프린스 호텔에서
칭호친왕
경칭전하
오인 (상징)백갈
출생일1946년 1월 5일
출생지가나가와현 미우라군 하야마정 미카사노미야 임시 거처
사망일2012년 6월 6일
사망 장소도쿄도 지요다구 간다스루가다이 사사키 연구소 부속 교운도 병원
매장일2012년 6월 14일
매장지도쿄도 분쿄구 도시마가오카 황실 묘지
배우자노부코 아소 (1980년 11월 7일 결혼)
자녀아키코 여왕
요코 여왕
왕가일본 황실
아버지미카사노미야 다카히토 친왕
어머니유리코 다카기
작위 및 가문
가문미카사노미야 가문 (도모히토 친왕 가문)
신분친왕
훈장
훈장대훈위 국화장
직함 및 직책
총재우애 십자회 총재
있는 그대로 총재
신기술 개발 재단 총재
온사 재단 제생회 총재
다카마쓰노미야 비 암 연구 기금 총재
일본 당구 협회 총재
일본 프로 스키 교사 협회 총재
중근동 문화 센터 총재
학습원 대학 응원단 최고 고문
명예 총재영국-일본 협회
명예 총재일본 럭비 풋볼 협회

2. 약칭

일본 황통보(皇統譜) 상의 기재는 '간닌 친왕'이며 한국의 외래어 표기법에 따라 '도모히토'로 읽는다. '간(寛)'의 구자체인 '寛에 『、』이 붙은 글자' 때문에 일본 정부의 공식 표기 및 본인의 저술 활동에서는 구자체가 사용되었는데, 보도 등에서는 신자체 표기가 많았다.[32]

수염을 덥수룩하게 기른 용모 탓에 '''털보 전하'''(ヒゲの殿下|히게노 덴카일본어)라는 애칭으로 알려졌다. 칭호(현 학위)는 정치학사(가쿠슈인 대학)[12], 스즈카 국립대학 명예객원교수이다.[33] 그 외에 명예 학위로써 명예박사(앙카라 대학교)의 칭호가 있다.

3. 생애

미카사노미야 도모히토 친왕은 수염을 기른 용모로 인해 ''수염 전하''(히게노 덴카)라는 애칭으로 널리 알려졌다. 칭호 (현 학위)는 정치학사 (가쿠슈인 대학)이며, 스즈카 국제 대학 명예 객원 교수였다.[12] 그 외 명예 학위로 명예 박사 (앙카라 대학교) 칭호를 가지고 있다.

1946년 1월 5일 가나가와현 하야마정의 미카사노미야 어가저(미쓰이 가문 별장)에서 미카사노미야 다카히토 친왕유리코 비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1980년 4월 18일 황실 회의를 거쳐 아소 다가키치의 셋째 딸이자 요시다 시게루내각총리대신의 외손녀인 아소 노부코와 약혼하고, 같은 해 11월 7일 결혼했다.

장애인 복지와 스포츠 진흥 등의 공무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특히 장애인스포츠 참여를 통해 사회 참여를 촉진하도록 스스로 지도를 맡았으며, 사회 복지 법인 "아리노마마샤" 활동과 시설 운영 등에도 관여하며 강연과 저술을 통해 계몽 활동에 힘썼다. 영국 유학을 계기로 국제 친선에도 강한 관심을 갖고, 영일 협회 명예 총재를 비롯하여 여러 국가와의 교제에도 의욕적으로 참여했다.

1982년 "황적 이탈 발언"으로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으며, 이에 대해 쇼와 천황은 기자 회견에서 "국민의 황실에 대한 기대를 충분히 파악하여, 그 기대에 따르도록 노력하라"고 말했다.

1995년 "경륜·경정 등에 명의 대여를 하고 매년 1,000만 엔 가까운 사례를 받았다"는 사실이 국회에서 문제시되었다. 당시 궁내청 장관은 "궁가에서 쓸 돈이 아니라 공공을 위해 기부할 의향이었다"고 설명했다.

2012년 6월 6일 15시 35분, 다장기 부전으로 인해 도쿄도 지요다구의 사사키 연구소 부속 쿄운도 병원에서 훙거했다.[49] 장례의는 같은 해 6월 14일에 거행되었고, 상주는 장녀인 아키코 여왕이 맡았다. 그 후 오치아이 사이조에서 화장되어 도요시마오카 묘지에 매장되었다.

도모히토 친왕의 훙거에 따라 당주 부재 상태가 계속되었지만, 2013년 6월 10일 궁내청은 "훙거에 거슬러 친왕가를 폐지한다"라고 발표했다.[51][52]

3. 1. 젊은 시절

1946년 1월 5일 가나가와현 하야마정의 미카사노미야 어가저(미쓰이 가문 별장)에서 미카사노미야 다카히토 친왕유리코 비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큰아버지인 쇼와 천황에게는 첫 조카였다.

도모히토 친왕 (가장 왼쪽)과 (왼쪽부터 시계 방향으로) 어머니인 미카사노미야 유리코 친왕비, 형인 요시히토 친왕, 누나인 야스코 여왕, 1950년경


어린 시절에는 누나인 지카코노미야 야스코 내친왕과 함께 테이메이 황후 (다이쇼 천황황후)에게 특히 귀여움을 받았다.[34]

세이신 여자 학원 유치원, 가쿠슈인 초등과, 가쿠슈인 중·고등과를 거쳐 가쿠슈인 대학에 입학했다. 아버지 미카사노미야 다카히토 친왕의 교육 방침은 "방임주의"여서, 어릴 때 부모로부터 "공부 좀 하라"는 잔소리를 들은 적이 없었다고 한다. 초등과에서는 다른 일반 아이들과 달리 특별 대우를 받았는데, 등하교 때 신발장이 특별실에 설치되기도 했으며, "도모짱"이라고 불렀다가 교사로부터 "무엄하다! 왕자님이라고 불러라"라고 호되게 야단맞는 아이도 있었다. 학교에서는 스키, 소프트볼스포츠에 열중했으며, 특히 초등학교 4학년부터 타기 시작한 스키는 고등학교 2학년 때 스키 배지 테스트 1급을 취득할 정도였다. 한편으로 학업 성적은 "엉망진창으로 나빴다"고 한다.

가쿠슈인 고등과 응원단에 들어가 3학년 때는 단장을 맡았다. 응원단에서의 위엄을 기르기 위해 2학년 때 콧수염, 3학년 때 턱수염을 길렀다(당시 가쿠슈인 고등과에는 수염에 관한 교칙은 없었다). 1977년 테츠코의 방에 출연했을 때 "고등학생이 되면서 양아치처럼 행동하고,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담배를 피우기 시작했으며, 음주에 이르러서는 더 젊은 시절부터 시작했다"고 회고했다.[14]

1966년 1월, 성년식에 따라 대훈위에 서위되고, 국화대수장을 수여받았다.

같은 해 9월 15일, 애차인 프린스 스카이라인 GT-B를 운전하여 시부야구 진구마에의 오모테산도에서 유턴하려다 오토바이를 들이받았다. 오토바이를 운전하던 기숙사 점원이 왼쪽 대퇴골 골절로 전치 6개월의 중상을 입었고, 뒷좌석에 타고 있던 소년도 경상을 입었다. 인적 사고를 일으킨 경우에는 "자동차 운전을 그만두겠다"고 어머니 미카사노미야 비 유리코와 약속했고, 운전 면허증을 도쿄도 공안 위원회에 반납했다.

1968년 가쿠슈인 대학 법학부 정치학과를 졸업하고 (정치학사), 같은 해 4월부터 1970년 8월까지 2년 반 동안 영국 옥스퍼드 대학교 매그덜렌 칼리지에 유학했다. 아버지 다카히토 친왕과 의숙모 지치부노미야 비의 권유에 의한 것이었다. 매그덜렌 칼리지는 큰아버지 지치부노미야 야스히토 친왕이 재적했던 곳이기도 했다.

유학 초기 영어는 "How do you do?" 와 "Thank you very much." 밖에 이해하지 못했지만, 어학원 "Godmer House School"에 3개월 다니고 칼리지로 옮긴 뒤에는 주 1회 논문을 "열에 여섯일곱 정도의 힘으로" 끝내고 "나머지는 사람을 사귀는 데 썼다"고 한다. 보증인은 케즈윅 가문의 존 케즈윅이었고, 처가인 아소 가문도 뒷바라지했다.

영국 체류 중에는 엘리자베스 2세에게 불려가 버킹엄 궁전에서 에든버러 공작 필립, 찰스 3세 (당시 황태자), 앤 공주와 자리를 함께 하기도 했으며, 유럽에 머무는 동안 6개월은 스위스오스트리아에서 스키를 탔다.

1970년 1월 5일 24세 생일에 런던 주영 일본 대사 공저에서 가장 파티를 열었다. "(자신의 증조부이기도 한) 메이지 천황과 (용모가) 닮았으니 대원수 복장을 하라"고 친구에게 권유받아 아버지 (제국 육군 기병 장교)로부터 기병 장교 군복을 받아 입었다. 일본의 일부 신문이 이를 비판적으로 보도했다. 또한 주차 위반 과태료 독촉을 받고도 내지 않아 황족인 도모히토 친왕에게 체포 영장이 발부되기도 했다.

3. 2. 결혼과 가족

미카사노미야 도모히토 친왕은 1980년 5월 21일 아소 다카키치의 셋째 딸이자 요시다 시게루내각총리대신의 외손녀인 아소 노부코와 약혼하고, 같은 해 11월 7일에 결혼했다. 노부코 비는 전 내각총리대신 겸 부총리인 아소 다로의 여동생이기도 하다. 이들 부부는 슬하에 두 딸을 두었다.

  • 아키코 여왕|彬子女王|아키코 조오일본어 (1981년 12월 20일 도쿄 출생)
  • 요코 여왕|瑶子女王|요코 조오일본어 (1983년 10월 25일 도쿄 일본 적십자 의료센터 출생)


가족은 미나토구 모토아카사카에 있는 아카사카 어용지 단지 내에 거주했다. 2009년 10월, 노부코 비는 도모히토 친왕 및 자녀들과 별거했다.[6]

도모히토 친왕의 사망으로 당주가 없는 상태가 지속되다가, 2013년 6월 10일 궁내청은 도모히토 친왕의 사망 시점으로 소급하여 친왕가를 폐지한다고 발표했다.[51][52] 이에 따라 노부코 비와 두 딸은 미카사노미야 본가에 합류하게 되었고, 도모히토 친왕의 저택은 '미카사노미야 동저'로 개칭되었다.

3. 3. 공적 활동

1972년 삿포로 동계 올림픽 조직위원회 위원(1970년-1972년), 1975년 오키나와 엑스포 위원회에서 활동했다.[2]

도모히토 친왕은 암 연구(다카마츠노미야 비 암 연구 기금) 관련 단체, 청소년 교육 및 국제 관계 증진을 위한 다양한 단체의 회장 및 명예 회장을 역임했다.(2003년-) 또한 스키, 볼링, 댄스 및 럭비와 같은 스포츠 활동을 통해 신체적 또는 정신적 장애가 있는 사람들의 복지를 증진하는 단체를 지원했다.[2] 그는 질병과 복지 문제를 다루는 자선 및 지원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부인과 함께 해외를 많이 방문했다. 친왕은 종종 강연을 하고, 신문과 잡지에 기고했으며, 7권의 책을 저술하기도 했다.[2]

1992년 12월, 친왕 부부는 뉴욕 의과대학에 신설된 암 병동을 지원하기 위해 미국을 방문했고, 1994년에는 쿠아키니 병원의 재건을 지원하기 위해 하와이를 방문했다. 1994년 2월, 친왕 부부는 노르웨이릴레함메르에서 열린 1994년 동계 올림픽에 참석하기 위해 노르웨이를 방문했다.[2]

1998년 4월, 친왕 부부는 터키-일본 재단 문화 센터 개막식에 참석하기 위해 터키를 방문했다. 그들은 1990년 일본-터키 관계 100주년 기념 행사의 일환으로 터키를 방문한 적이 있었다. 친왕은 일본 중동 문화 센터에 일본 아나톨리아 고고학 연구소 설립을 강력하게 지지했으며, 2002년 10월, 2003년 6월, 2003년 10월에 다시 터키를 방문하여 세 그룹의 후원자들을 이끌고 터키 유적지를 둘러보았다.[2]

1998년 6월, 도모히토 친왕은 호주 노벨상 수상자인 하워드 월터 플로리 박사를 기념하기 위한 의학 과학 재단을 위한 기금 마련 활동을 위해 호주를 방문했다. 같은 해 12월, 그는 제13회 아시안 게임에 참석하기 위해 태국을 방문했다.[2]

2003년 4월, 도모히토 친왕은 시각 장애인을 위한 세계 크로스컨트리 스키 선수권 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딸 아키코 여왕과 함께 노르웨이를 방문했다.[2]

그는 젊은 시절 라디오 DJ로 출연한 적도 있다.[2]

다른 황족과 마찬가지로, 각 단체의 총재 직이나 명예 총재 직을 다수 역임하고 있다. 우애십자회, 있는 그대로의 집, 공익 재단법인 신기술 개발 재단, 은사재단 제생회 등의 사회복지법인이나 다카마츠노미야비 암 연구 기금 등, 의료·복지에 관한 단체에서 임원을 맡는 경우가 많다.[21]

스포츠에도 조예가 깊어, 일본 빌리아드 협회, 일본 직업 스키 교사 협회, 일본 학생 빙상 경기 연맹 등 스포츠 관련 단체의 임원도 많이 맡고 있으며[21], 전국 대학 럭비 풋볼 선수권 대회, 전일본 프로 포켓 빌리아드 선수권, 경륜의 간닌 친왕배·세계 선수권 기념 토너먼트 등의 대회에서는 자신의 이름을 딴 우승컵·패가 수여되고 있다. 또한, 1987년에 창설되어, 아오모리현에서 매년 개최하는 '이와키산 스키 마라톤 대회'에서는 대회 총재로 취임했을 뿐만 아니라, 직접 코스 세팅의 지휘를 맡아, 또한 선수로서 출전하는 등 운영 면에서도 열심으로 임했다.

1981년 11월, 부부가 자위대 음악 축제에 참석을 희망했지만,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황족은 자위대와 거리를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큰 파문을 일으켰다.[26] 음악 축제는 관열식·관함식과 달리, 일반인에게 PR하는 것이 주된 목적이기 때문에, 빈객이 아닌 특별 초청자의 대우로 준비가 진행되었다.

3. 4. 황위 계승 문제에 대한 입장

헤이세이 시대일본어에 들어 헌법상의 제약으로 천황 및 황족이 여계 천황의 시비에 대해 자신의 의견을 공표할 기회는 제한되어 있었다. 미카사노미야 도모히토 친왕은 자신이 회장을 맡고 있는 복지 단체 '하쿠보카이'(柏朋会)의 회보 '더·도도'(ざ・とど)에서 "어디까지나 공적인 것이 아닌 사적인 견해"라고 전제한 뒤, 여계 천황에 대한 견해를 표명했다. 이 기관지는 시판되지 않았다. 이 안에서 도모히토 친왕은 여계 천황에 명확히 반대하며, 구 황족의 황적 복귀 등을 요구했다.[7]

도모히토 친왕은 "(2000년 이상의) 역사와 전통을 헤이세이 시대에 너무나 쉽게 변경해도 되는가"라며 여계 천황을 용인하는 의견을 비판하며, "만세일계, 125대의 천황의 황통이 귀중한 이유는, 신화 시대의 초대 진무 천황으로부터 연면히 한 번의 예외도 없이 '남계'로 이어져 왔다는 엄연한 사실"이라고 주장했다. 도모히토 친왕은 남계 계승을 유지하기 위한 방법으로 다음을 제시했다.

# 1947년에 황적에서 이탈한 구 황족의 황적 복귀.

# 여성 황족(내친왕)이 구 황족(남계)으로부터 양자를 얻을 수 있도록 하고, 그 인물에게 황위 계승권을 부여한다.

# 폐지된 지치부노미야나 다카마쓰노미야의 제사를 구 황족에게 계승하게 하고, 미야케를 재흥한다.

# 옛날처럼 "측실"(일부다처제) 제도를 부활시킨다. 다만, 자신(도모히토 친왕)으로서는 찬성하지만, 국내외 모두 현재 상황으로는 실현 가능성이 희박하다고 언급했다.

그러면서 "폐하(당시 아키히토)나 황태자 전하(현재 나루히토)는, 자기 집안의 일이므로 스스로 발언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이, 우리나라를 형성하는 '민초'의 일원으로서, 2665년(진무 천황 즉위 기원, 통칭: 황기)의 역사와 전통에 대해 제대로 의견을 갖고 발언해 주지 않으면, 언젠가는 '천황은 필요 없다'는 논의로까지 발전할 것입니다."라고 결론지으며, 여계 천황 용인의 움직임에 반대하는 의견을 밝혔다.

또한, 2006년 1월 3일마이니치 신문, 잡지 '분게이슌주' 2006년 2월호의 인터뷰에서도 마찬가지의 견해를 표명했다. 특히 후자에서는,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나 유식자 회의가 "여계 천황 용인의 방침인 것은, 천황 폐하(당시 아키히토)의 내의를 받아서 하는 것이 아닌가"라는 소문에 대해, "본인에게 직접 확인하지는 않았지만, 저렇게 신중한 폐하가 여계 천황이나 장자 우선 계승에 찬성할 리가 없다. 소문은 사실무근의 억측일 것이다."라고 천황의 진의를 헤아렸다.[8][9]

일본 황위 계승 논쟁이 벌어지던 시기에, 당시 일본 내각총리대신 고이즈미 준이치로는 여성이 황위에 오르는 것을 허용하도록 황실전범 개정을 강력하게 지지하며, 2006년 국회 회기에 관련 법안을 제출하겠다고 약속했다. 일부 보수적인 국회의원들은 고이즈미에게 반대하며 논의가 시기상조라고 주장했다. 도모히토 친왕 또한 이 제안에 반대하며, 과거에는 남성 사생아도 황위를 계승할 수 있었기 때문에 일본 황실의 공식 남성 구성원들이 남성 계승자를 낳기 위해 첩을 들이게 될 수도 있다고 말했다. 이후 그는 이 발언이 단순한 농담이었다고 말했다.

미카사노미야 도모히토 친왕의 견해에 대한 여러 반응은 다음과 같았다.

관련자반응 내용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 (당시)황위 계승 자격자 논의에 대해, 황족에게 의견을 듣는 것은 헌법 위반에 해당하지 않고, 의견을 표명하는 것은 자유라고 하였다.
요시카와 히로유키 도쿄대학 명예교수
(황실전범에 관한 유식자 회의 의장)
미카사노미야 도모히토 친왕의 견해는 회의에 영향을 미치지 않으며, 여계 천황 용인 자세는 변경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이시카와 요시노부 시즈오카현 지사미카사노미야 도모히토 친왕의 견해에 대해 "유사한 생각을 가지고 있으며 공감했다"라고 발언했다. 더욱이 황위 계승 자격자 논의에 대해, 조급한 논의에 의문을 제기하며 "전통적인 국가의 모습에 관련된 것을, 불과 수개월 만에 결론을 내고, 어떤 방향으로 끌고 가려 하는 것은 터무니없는 이야기이며 너무나 조급하다. 유식자 회의에는 황실 문제에 대해 오랫동안 연구해 온 사람이 몇 명이나 들어 있는가 하면 초라하기 그지없다"라고 주장했다.
아사히 신문사설 속에서 부정적인 견해를 보였으며, 2006년 2월 2일자 사설에서 미카사노미야 친왕 발언은 이제 삼가주시길이라는 제목으로 "정치적 발언이며, 상징 천황제라는 일본국 헌법으로 정해져 있는 대원칙에서 벗어나 있다"라고 주장했다.
산케이 신문다음 날인 3일의 사설에서 아사히 사설 "언론 탄압"이야말로 삼가주시길, 또한 슈칸 분슌과 슈칸 신초는 각각 미카사노미야 친왕 전하께 "입 다물라"고 명령한 아사히 신문 논설위원의 실명과 식견, 미카사노미야 친왕 전하께 "입 다물라"고 명령한 아사히 신문, 그렇게 대단해? 등과 같이 주장하며, 아사히 신문을 비판했다.


3. 5. 도모히토 친왕의 견해에 대한 반향

헤이세이 시대|(平成時代)일본어에 들어 헌법상의 제약으로 천황 및 황족이 여계 천황에 대해 자신의 의견을 공개적으로 언급할 기회는 제한되어 있었다. 도모히토 친왕은 자신이 회장으로 있는 복지단체 '하쿠보카이'(柏朋会)의 회보인 '더 도도'(ざ・とど)에서 "공적인 지위가 아닌 개인적인 견해"라고 전제하면서, 여계 천황에 대한 견해를 표명하였다. 이 기관지는 시판되지 않았다. 여기서 도모히토는 여계 천황에 대해 명확하게 반대하는 입장을 보였으며, 구 황족들이 황적으로 복귀할 것 등을 촉구하였다.

도모히토 친왕은 "2천 년 이상의 역사와 전통을 헤이세이 시대에 왔다 하여 간단히 바꾸어서 되겠는가"라며 여계 천황을 용인하자는 의견을 비판하였고, "만세일계(万世一系), 125대의 천황의 황통이 귀중한 이유는 신화 시대의 초대 진무 천황으로부터 이어져 한 번의 예외도 없이 '남계'로 이어져 왔다는 것이 엄연한 사실이다"라고 주장하였다. 도모히토 친왕은 남계 계승을 유지하기 위한 방법으로 다음과 같은 방안들을 제시했다.

# 1947년에 황적을 이탈한 옛 황족들을 황적에 복귀시킬 것.

# 여성 황족(내친왕)에게 옛 황족(남계)으로부터 양자를 들이게 하고 그 아들에게 황위 계승권을 줄 것.

# 폐지된 지치부노미야나 다카마쓰노미야의 제사를 옛 황족들 가운데 골라서 다시 잇도록 하여 미야케를 재흥시킬 것.

# 예전처럼 측실(일부다처제) 제도를 부활시킬 것. 다만 이는 자신(도모히토 친왕)으로서는 찬성하지만 국내외 뿐만 아니라 현재 전 세계적으로 실현 가능성이 떨어진다.

그러면서 "폐하(당시 아키히토)나 황태자 전하(현 나루히토)는 집안 일이기 때문에 직접 말씀하실 수는 없습니다.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이 우리 나라를 형성하는 민초의 일원으로서 2665년(황기)의 역사와 전통에 대해 제대로 의견을 갖고 발언해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언젠가 '천황이 필요 없다'는 논의로까지 발전할 것입니다."라고 하며, 여계 천황 용인에 반대하는 의견을 내었다.

2006년 1월 3일마이니치 신문과 잡지 '분게이슌주(文藝春秋)' 2006년 2월호 인터뷰에서도 같은 견해를 표명하였다. 특히 '분게이슌주'에서는 고이즈미 준이치로 수상이나 지식인 회의가 "여성 천황 용인의 방침이라는 것은 천황 폐하(당시 아키히토)의 뜻을 받들어서가 아닌가"라는 소문에 대해 "본인에게 직접 확인하지는 않았지만, 조심스러운 폐하가 여계 천황이나 장자 우선 계승에 찬성하실 리는 없다. 소문은 사실 무근의 억측일 것이다"라고 하였다.

  • 도모히토 친왕이 해당 견해를 발표하기 전, 고이즈미 준이치로 내각총리대신의 사적 자문 기관인 "황실전범에 관한 유식자 회의"의 좌장 깃카와 히로유키 도쿄 대학 명예교수는 황위계승 자격자 의론에 대해서 "황족의 의견을 듣는 것은 헌법 위반이다"라고 지적하였다. 또한 "헌법의 해석권은 유시키샤 회의에 있다"라고도 하였다.
  • * 한편 2005년 11월 4일 도모히토 친왕의 견해에 대한 기자질문에 대해 고이즈미 준이치로 당시 수상은 "황위 계승 자격자 논란에 대해 황족으로부터 의견을 듣는 정도는 헌법 위반에 해당되지 않으며, 의견을 표명하는 것은 자유이다"라고 대답하였다.
  • 11월 7일, 유시키샤 회의의 회합을 마친 깃카와 히로유키는 "도모히토 친왕의 견해는 회의에 영향을 주지 못했으며, 여계 천황 용인의 자세는 변함이 없다"라고 하였다. 같은 날 고이즈미 수상은 여계 천황을 용인하는 유시키샤 회의의 방침을 지지한다는 뜻을 밝혔다.
  • 11월 14일, 시즈오카현지사 이시카와 요시노부는 정례 기자회견에서 도모히토 친왕의 견해에 대하여 "마찬가지 생각을 가지고 있으며 공감한다"라고 발언하였다. 나아가 황위계승 자격자 의론에 대해서 졸속 의론에 의문을 표하며 "전통적인 국체와 관련된 것을 불과 몇 개월 만에 결론을 내리고 어떤 방향으로 끌고 가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소리다. 너무 졸속이다. 지식인 회의에는 황실 문제에 대해 오랜 세월 연구해 온 사람이 몇 명이나 있는지 보자면 허술하기 짝이 없을 뿐이다"라고 주장하였다.
  • 아사히 신문은 사설에서 부정적인 견해를 보였고, 2006년 2월 2일자 사설에서 '도모히토 전하 이제 발언은 좀 자제하심이'라는 제목으로 "정치적 발언이자 상징 천황제라는 일본국 헌법의 대원칙에서 벗어난 것이다."라고 주장하였다.
  • * 산케이 신문은 다음날인 3일 사설에서 '아사히 사설 "언론봉쇄" 삼가하는 것이'라는 제목의 사설에서, 그리고 주간 문춘이나 주간 신조도 '도모히토 친왕 전하에게 "입 다물라"고 명하는 아사히 신문 논설위원의 실명과 식견', '도모히토 친왕 전하에게 "입 다물라" 명하는 아사히 신문은 그리도 대단한가?' 등의 주장을 하며 아사히 신문을 비판하였다.

3. 6. 병력

1990년대부터 도모히토 친왕은 암, 알코올 의존증 등 여러 질병으로 고통받았다.

1991년 1월 식도암 수술을 받았으며,[40] 1995년까지 혀뿌리, 목의 림프절, 후두 등 여섯 번에 걸친 암 수술을 받았다.[41] 이때의 투병 경험을 1999년 투병기 『암을 말하다』로 출판하기도 했다.[42]

2006년 9월 16일에는 세수하던 도중에 쓰러져 턱 골절상을 입었다. 또한 알코올 중독으로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였다(2010년 1월 8일에 다섯 번째 입원). 입원하고 나서도 병원에서 공무에 출석하였고, "삐져서 안 나오는 거냐"[43]라는 발언 등 행동력 있고 예리한 발언은 건재하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당초 입원은 한 달 정도로 예정되어 있었으나 3주 만에 퇴원하였다. 그해 10월 20일에는 미국 잡지와의 인터뷰도 할 정도로 회복된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인두암이 발견되어 2008년 3월에 다시 수술을 받았다. 이때에는 목소리를 남기는 방향으로 수술이 진행되었지만, 음식물을 잘 삼킬 수 없게 되었고, 4월에는 폐렴이 발병해 재입원했다. 이때 목 일부를 막는 수술을 했는데, 이로 인해 성대를 진동시키는 기도가 막혀 목소리를 잃었다. 이후 공무를 볼 때는 전자 성대를 목에 대고 대화를 해야 했다.

2010년 8월 19일에는 부정맥 치료로 입원했고, 9월 정기검진에서 새로 목에 암이 발견되면서 12월 14일에 내시경 수술을 받았다.[44]

2011년 2월에는 폐렴으로 입원했다. 7월 8일에는 중인두 상피에서 발견된 암의 절제 수술을 위해 입원했는데, 1991년 이후 암과 관련된 수술이나 치료를 받은 것은 이것이 14번째였다.

2012년 1월에는 인후에서 또 종양이 발견되어, 사사키 연구소 부속 쿄운도 병원에서 1월 10일, 종양과 주변 림프절을 적출하고, 결손부에 대한 복부 이식 처치를 수반하는 수술을 7시간 반에 걸쳐 받았다. 수술 후 세포 조직 검사를 실시한 결과, 도모히토 친왕의 병세가 '인후암 재발로 보인다'고 의사단은 발표했다.[45] 3월에는 식사에 장애가 되었던 목 연골 제거 수술을 받았다.[46]

같은 해 6월, 목에서 2회 출혈이 있어 수혈을 받아야 할 상황에까지 이르렀던 것으로 4일 밝혀졌다.[47] 다음 5일, 궁내청은 도모히토 친왕의 신장이나 폐, 간의 기능이 저하 상태에 있어, 의식 레벨이 저하하고 있다고 발표했다.[48] 2012년 6월 6일 15시 35분, 입원 중이던 도쿄도 지요다구의 사사키 연구소 부속 쿄운도 병원에서, 훙거하였다.[49] 같은 날 궁내청의 회견에서, 사인은 다발성 장기 부전으로 발표되었다.[50]

1991년 1월에 처음 암이 발견된 후 21년 동안 암 수술이나 치료는 모두 16번에 달하였다.[35]

4. 일화

미카사노미야 도모히토 친왕은 수염을 기른 용모로 ''''수염 전하''''(히게노 덴카)라는 애칭으로 알려졌다.[2] 칭호 (현 학위)는 정치학사 (가쿠슈인 대학), 스즈카 국제 대학 명예 객원 교수[12]앙카라 대학교 명예 박사였다.

황통보 상의 기재는 '관인 친왕'인데, '관'의 구자체인 '관'에 '、'가 붙은 글자이기 때문에, 정부에 의한 공식 표기 및 본인의 저술 활동에서는 구자체가 사용되었지만, 신문에서는 신자체를 사용했기 때문에 보도 등에서는 신자체로 표기되는 경우가 많았다.

젊은 시절에는 라디오 DJ로 출연하기도 했다.[2]

4. 1. 저술 및 발언 관련

도모히토 친왕은 일본 각지에서 강연 활동을 하고, 신문과 잡지 등에 글을 쓰는 등 저술 활동도 활발하게 했다. 에세이 등을 묶은 저서도 많이 출간했다.[53]

독신 시절인 1976년에는 후지 TV의 《스타 천일야》, 1977년에는 TV 아사히의 《테츠코의 방》과 같은 토크쇼에 출연했다. 1980년 결혼 후에는 부인 노부코 비와 함께 텔레비전 버라이어티 프로그램에 출연하기도 했다.[54]

1975년 10월 28일에는 닛폰 방송의 《올나이트 닛폰》에서 생방송 디스크 자키를 맡았다. '토모 씨의 올나이트 닛폰!'이라는 첫마디로 시작한[23] 이 프로그램에서 그는 스튜디오에서 프로그램 디렉터가 만들어 주는 위스키 온 더 록을 마시면서 황실, 자신의 신상, 첫사랑, 복지 이야기 등을 했다. 비틀즈의 《헤이 주드》 등 음악을 곁들여 2시간 동안 이야기를 나누었다.[23] 방송을 듣던 동생 노리히토 친왕은 "2시 이후에는 발음이 꼬였다"라고 지적했다. 그는 방송에서 자신의 황위 계승 순위가 7위라는 숫자가 마음에 든다며, 당시 황태자비 미치코에게 "더 이상 남자아이를 낳지 말아 달라"고 말했다. 구로야나기 테츠코가 궁내청 직원의 반응을 묻자, "별로 이제… 포기했겠죠, 저에 대해서는"이라고 답했다.

1981년 4월에는 분카 방송에서 장애인 복지를 소개하는 '내일을 밝게~해피 모닝'의 진행자를 맡았다.[24]

2007년 10월에는 뉴욕 타임스 인터뷰에서 "가쿠슈인 시절에는 야마노테선을 타고 통학했다", "조선학교 학생에게 시비를 걸린 적도 있었다"라며 학창 시절을 회상했다. "그들은 가쿠슈인의 제복을 보면 항상 달려들었습니다"라는 혐한성 발언도 기록되어 있다. 인터뷰에서는 나루히토 당시 왕세자의 이른바 '인격 부정 발언'[55]에 대해서도 언급했는데, "편지에 답신했더라면, 약간의 진전은 있었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의견을 말한 것에 대한 답례를 하는 답신밖에 오지 않았다"라고 했다. 나루히토 친왕에게 발언에 대해 설명하도록 장문의 편지를 보냈지만 답례 정도의 답신밖에 받지 못해 진전이 없었다는 것이다. 또한 알코올 의존증을 공표한 것에 대해 "황실은 스트레스 덩어리"라고 말했다.[56]

2003년 3월 7일, 타카나와 프린스 호텔에서의 강연에서


헤이세이 시대에 들어 헌법상의 제약으로 천황 및 황족이 여계 천황 문제에 대해 자신의 의견을 공표할 기회는 제한되었다. 도모히토 친왕은 자신이 회장을 맡고 있는 복지 단체 '백붕회'(柏朋会, 하쿠호카이)의 회보 '더·도도'(ざ・とど)에서 "어디까지나 공적인 것이 아닌 사적인 견해"라고 전제한 뒤, 여계 천황에 대한 견해를 밝혔다. 이 기관지는 시판되지 않는다. 그는 여계 천황에 명확히 반대하며, 구 황족의 황적 복귀 등을 요구했다.

도모히토 친왕은 "(2000년 이상의) 역사와 전통을 헤이세이 시대에 너무나 쉽게 변경해도 되는가"라며 여계 천황을 용인하는 의견을 비판했다. "만세일계, 125대의 천황의 황통이 귀중한 이유는, 신화 시대의 초대 진무 천황으로부터 연면히 한 번의 예외도 없이 '남계'로 이어져 왔다는 엄연한 사실"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남계 계승을 유지하기 위한 방법으로 다음을 제시했다.

# 1947년에 황적 이탈한 구 황족의 황적 복귀.

# 여성 황족(내친왕)이 구 황족(남계)으로부터 양자를 얻을 수 있도록 하고, 그 인물에게 황위 계승권을 부여한다.

# 폐지된 지치부노미야나 다카마쓰노미야의 제사를 구 황족에게 계승하게 하고, 궁가를 재흥한다.

# 옛날처럼 "측실"(일부다처제) 제도를 부활시킨다. 자신으로서는 대찬성이지만, 국내외 모두 지금의 세태로는 다소 실현성이 희박하다고 생각한다고도 말했다.

그는 "폐하(현·상황)나 황태자 전하(현·천황)는, 자기 집안의 일이므로 스스로 발언하시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이, 우리나라를 형성하는 '민초'의 일원으로서, 2665년(진무 천황 즉위 기원, 통칭: 황기)의 역사와 전통에 대해 제대로 의견을 갖고 발언해 주지 않으면, 언젠가는 '천황은 필요 없다'는 논의로까지 발전할 것입니다."라고 결론지으며, 여계 천황 용인의 움직임에 반대하는 의견을 밝혔다.

2006년 1월 3일자 마이니치 신문, 잡지 '분예춘추' 2006년 2월호 인터뷰에서도 같은 견해를 표명했다. 특히 후자에서는, 고이즈미 준이치로 내각총리대신이나 유식자 회의가 "여계 천황 용인의 방침인 것은, 천황 폐하(당시: 아키히토)의 내의를 받아서 하는 것이 아닌가"라는 소문에 대해, "본인에게 직접 확인하지는 않았지만, 저렇게 신중한 폐하가 여계 천황이나 장자 우선 계승에 찬성할 리가 없다. 소문은 사실무근의 억측일 것이다."라고 천황의 진의를 추측했다.

  • 미카사노미야 도모히토 친왕이 견해를 발표하기 전, 고이즈미 준이치로 내각총리대신의 사적 자문 기관인 "황실전범에 관한 유식자 회의" 의장인 요시카와 히로유키 도쿄대학 명예교수는 황위 계승 자격자 논의에 대해 "황족에게 의견을 듣는 것은 헌법 위반이다"라고 지적했다. 또한 "헌법의 해석권은 유식자 회의에 있다"라고 주장했다.
  • * 한편 2005년 11월 4일, 미카사노미야 도모히토 친왕의 견해에 대한 기자 질문에 대해,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당시)는 "황위 계승 자격자 논의에 대해, 황족에게 의견을 듣는 것은 헌법 위반에 해당하지 않고, 의견을 표명하는 것은 자유이다"라고 답변했다.
  • 같은 해 11월 7일, 유식자 회의 회의를 마친 요시카와 히로유키는 "미카사노미야 도모히토 친왕의 견해는 회의에 영향을 미치지 않으며, 여계 천황 용인 자세는 변경하지 않는다"라고 했다. 같은 날, 고이즈미 총리도 여계 천황을 용인하는 유식자 회의의 방침을 지지한다는 생각을 나타냈다.
  • 같은 해 11월 14일, 시즈오카현 지사 이시카와 요시노부는 정례 기자 회견에서, 미카사노미야 도모히토 친왕의 견해에 대해 "유사한 생각을 가지고 있으며 공감했다"라고 발언했다. 더욱이 황위 계승 자격자 논의에 대해, 조급한 논의에 의문을 제기하며 "전통적인 국가의 모습에 관련된 것을, 불과 수개월 만에 결론을 내고, 어떤 방향으로 끌고 가려 하는 것은 터무니없는 이야기. 너무나 조급하다. 유식자 회의에는 황실 문제에 대해 오랫동안 연구해 온 사람이 몇 명이나 들어 있는가 하면 초라하기 그지없다"라고 주장했다.
  • 아사히 신문은 사설 속에서 부정적인 견해를 보였으며, 2006년 2월 2일사설에서 '미카사노미야 친왕 발언은 이제 삼가주시길'이라는 제목으로 "정치적 발언이며, 상징 천황제라는 일본국 헌법으로 정해져 있는 대원칙에서 벗어나 있다"라고 주장했다.
  • * 산케이 신문은 다음 날인 3일의 사설에서 '아사히 사설 "언론 탄압"이야말로 삼가주시길', 또한 주간 문춘과 주간 신조는 각각 '미카사노미야 친왕 전하께 "입 다물라"고 명령한 아사히 신문 논설위원의 실명과 식견' '미카사노미야 친왕 전하께 "입 다물라"고 명령한 아사히 신문, 그렇게 대단해?' 등과 같이 주장하며, 아사히 신문을 비판했다.

저서

  • 『토모 씨의 영국 유학』분게이슌주, 1971년
  • 『황족의 혼잣말』후타미 서방, 1977년
  • 『수염의 전하 일기』쇼가쿠칸, 2022년. ISBN 4093888590
  • 『추억의 쇼와 천황, 곁에서 뵈었던 수수한 모습의 폐하』고분샤 갓파 북스, 1989년 12월. ISBN 4334004903
  • 야마다 토미야·사와지 히사에와, 듣는이 사이토 타케시 『생명의 시간』신초샤, 1995년. ISBN 410409501X
  • * 『생명의 시간』신초 문고, 1998년. ISBN 4101476217
  • 『암을 말하다』슈후노토모샤, 1999년. ISBN 4072211036
  • 토모히토 친왕 저술, 듣는이 가세 히데아키·사쿠라이 요시코·고보리 케이이치로 『황실과 일본인 - 토모히토 친왕 전하 여쭙니다』메이세이샤, 2006년. ISBN 4944219415
  • 토모히토 친왕, 듣는이 구도 미요코[31] 『황족의 "공"과 "사" - 추억의 사람, 추억의 때』PHP 연구소, 2009년
  • 『지금 베일을 벗는 젠틀맨의 극의』쇼가쿠칸, 2010년, 친구 3명(쿠로스 토시유키, 쿠로카와 미츠히로, 핫토리 스스무)과의 신사복 담론. ISBN 4093881111

4. 2. 공적 생활 관련

다른 황족들과 마찬가지로 미카사노미야 도모히토 친왕은 여러 단체의 총재나 명예총재직을 맡았다. 우애십자회, 있는 그대로의 집, 신기술개발재단, 은사재단 제생회 등 사회복지법인이나 다카마쓰노미야 비 암 연구기금 등 요양의료 및 복지 관련 단체의 임원을 맡는 일이 많았다.[53]

스포츠에도 조예가 깊어 일본당구협회, 일본직업스키교사협회, 일본학생빙상경기연맹 등 스포츠 관련 단체의 임원도 많이 맡았으며,[53] 전국대학 럭비풋볼 선수권대회, 전일본 프로포켓당구선수권대회, 경륜의 도모히토 친왕배 · 세계선수권 기념토너먼트 등의 대회에서는 그의 이름을 딴 우승배·패가 수여된다. 1987년에 창설되어 아오모리현에서 매년 개최되는 이와키 산 스키마라톤 대회에서는 대회 총재로 취임했을 뿐만 아니라 직접 코스 세팅의 지휘를 맡고 선수로서도 출장하는 등 운영 면에서도 열심히 임했다.[57]

1981년 11월, 도모히토 친왕 부부가 자위대 음악 축제에 참석하기를 희망하였는데,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일본 황족은 자위대와 거리를 유지하고 있었기에(당시) 큰 파문을 불러 일으켰다.[58] 음악제는 관열식 ・ 관함식과는 달리 일반인에 대한 PR이 주요 목적이기 때문에 빈객이 아닌 특별 초대자 대우로 준비가 이루어졌다.

도모히토 친왕은 1972년 삿포로 동계 올림픽을 위해 1970년부터 1972년까지 조직위원회의 위원으로 활동했다. 그는 또한 1975년 오키나와 엑스포 위원회에도 참여했다.

도모히토 친왕은 2003년부터 자신이 앓았던 암 연구 (다카마츠노미야 비 암 연구 기금) 관련 단체, 청소년 교육 및 국제 관계 증진을 위한 다양한 단체의 회장 및 명예 회장을 역임했다. 그는 또한 스키, 볼링, 댄스 및 럭비와 같은 스포츠 활동을 통해 신체적 또는 정신적 장애가 있는 사람들의 복지를 증진하는 단체를 지원한 것으로도 유명했다. 그는 질병과 복지 문제를 다루는 자선 및 지원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부인과 함께 해외를 광범위하게 여행했다. 친왕은 종종 강연을 하고, 신문과 잡지에 기고했으며, 7권의 책을 저술하기도 했다.

1992년 12월, 친왕과 비는 뉴욕 의과대학에 신설된 암 병동을 지원하기 위해 미국을 방문했고, 1994년에는 쿠아키니 병원의 재건을 지원하기 위해 하와이를 방문했다. 1994년 2월, 친왕과 비는 노르웨이릴레함메르에서 열린 1994년 동계 올림픽에 참석하기 위해 노르웨이를 방문했다.

1998년 4월, 친왕과 비는 터키-일본 재단 문화 센터 개막식에 참석하기 위해 터키를 방문했다. 그들은 앞서 1990년 일본-터키 관계 100주년 기념 행사의 일환으로 터키를 방문했다. 친왕은 일본 중동 문화 센터에 일본 아나톨리아 고고학 연구소 설립을 강력하게 지지했으며, 2002년 10월, 2003년 6월, 2003년 10월에 다시 터키를 방문하여 세 그룹의 후원자들을 이끌고 터키 유적지를 둘러보았다.

1998년 6월, 도모히토 친왕은 호주 노벨상 수상자인 하워드 월터 플로리 박사를 기념하기 위한 의학 과학 재단을 위한 기금 마련 활동을 위해 호주를 방문했다. 같은 해 12월, 그는 제13회 아시안 게임에 참석하기 위해 태국을 방문했다.

2003년 4월, 도모히토 친왕은 시각 장애인을 위한 세계 크로스컨트리 스키 선수권 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딸 아키코 여왕과 함께 노르웨이를 방문했다.

그는 젊은 시절 라디오 DJ로 출연했다.[2]

4. 3. 인물 관련

미카사노미야 도모히토 친왕은 다양한 사회 활동에 참여했으며, 그의 인품은 여러 일화를 통해 엿볼 수 있다.

  • 아이치 현 나고야 시의 한 명문 클럽에서 "오토바(御東場, 궁중 용어로 측간)가 더러워서 내가 청소해 뒀다"라고 말했다는 일화가 있다. 이는 오너 마담 가세 후미에(加瀬文恵)가 잡지 『플래티나 스타일』 취재에서 밝힌 내용이다.[59]
  • 맏딸 아키코 여왕에게는 "너는 세금으로 공부하는 거니까 남들보다 더 분발해야 한다"라고 훈계했다고 한다.[60] 아키코 여왕은 훗날 아버지에 대해 자신을 특별히 칭찬한 적은 없었지만, 할아버지 미카사노미야 다카히토 친왕은 아키코 여왕의 국사관 대학 명예박사학위 수여 소식에 "진무 이래의 쾌거다"라고 칭찬해 주었다고 회상했다.[60]
  • 차녀 요코 여왕은 아버지에 대해 "너무 세심한 데가 있었다"라고 평가했다.[61]
  • 1972년 삿포로 동계 올림픽 조직위원회 위원(1970년~1972년)과 1975년 오키나와 엑스포 위원회에서 활동했다.
  • 암 연구 관련 단체, 청소년 교육 및 국제 관계 증진을 위한 다양한 단체의 회장 및 명예 회장을 역임했다.
  • 스키, 볼링, 댄스, 럭비 등 스포츠 활동을 통해 장애가 있는 사람들의 복지를 증진하는 단체를 지원했다.
  • 질병과 복지 문제를 다루는 자선 및 지원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해외를 방문했다.
  • 1992년 12월, 뉴욕 의과대학에 신설된 암 병동을 지원하기 위해 미국을 방문했고, 1994년에는 쿠아키니 병원의 재건을 지원하기 위해 하와이를 방문했다.
  • 1994년 2월, 1994년 동계 올림픽 참석차 노르웨이를 방문했다.
  • 1998년 4월, 터키-일본 재단 문화 센터 개막식 참석차 터키를 방문했다. 1990년 일본-터키 관계 100주년 기념 행사의 일환으로 터키를 방문한 적이 있다.
  • 일본 중동 문화 센터에 일본 아나톨리아 고고학 연구소 설립을 지지했으며, 2002년 10월, 2003년 6월, 10월에 터키 유적지를 방문했다.
  • 1998년 6월, 하워드 월터 플로리 박사를 기념하기 위한 의학 과학 재단을 위한 기금 마련 활동으로 호주를 방문했다.
  • 1998년 12월, 1998년 아시안 게임 참석차 태국을 방문했다.
  • 2003년 4월, 시각 장애인을 위한 세계 크로스컨트리 스키 선수권 대회 참석차 딸 아키코 여왕과 함께 노르웨이를 방문했다.
  • 젊은 시절 라디오 DJ로 출연한 적이 있다.[2]
  • 수염을 기른 용모로 ''''수염 전하''''(히게노 덴카)라는 애칭으로 불렸다.
  • 칭호 (현 학위)는 정치학사 (가쿠슈인 대학), 스즈카 국제 대학 명예 객원 교수[12], 명예 박사 (앙카라 대학교) 칭호를 가지고 있다.
  • 1981년 11월, 부부가 자위대 음악 축제 참석을 희망했으나,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황족은 자위대와 거리를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큰 파문을 일으켰다.[26]
  • 부인 노부코 비와 서로를 '논치', '토모 씨'라고 불렀다. 식도암을 알아챈 것은 노부코 비였으며, 치료 중에는 노부코 비가 직접 의사와 영양사에게 조사하여 식사를 만들었다.[28]
  • 거짓으로 알코올 의존증 치료를 받은 것에 격분하여 노부코 비와 사이가 틀어져 2004년 7월 이후 별거했다. 훙거 전 노부코 비는 여러 번 병원을 방문했지만 면회하지 못했고, 장례식 참석도 허락되지 않았다.[29]

5. 가족 관계



아소 다로의 여동생인 노부코1980년에 결혼하여 장녀 아키코와 차녀 요코를 두었다. 도모히토 친왕은 부인 노부코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고 알려져 있다.[1]

6. 가계도

미카사노미야 다카히토 친왕할아버지:
다이쇼 천황할머니:
데이메이 황후어머니:
유리코할아버지:
다카기 마사요시할머니:
다카기 구니코



'''미카사노미야 도모히토 친왕'''일본어의 가계도는 다음과 같다.

미카사노미야 도모히토 친왕 가계도
1대2대3대4대
본인미카사노미야 도모히토 친왕미카사노미야 다카히토 친왕다이쇼 천황메이지 천황
배우자미카사노미야 노부코 공주유리코데이메이 황후
장녀미카사노미야 아키코 공주다카기 마사나리야나기하라 나루코
차녀미카사노미야 요코 공주다카기 구니코구조 미치타카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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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 뉴스 読売新聞 1981-11-06
[59] 간행물 週刊新潮 2007-04-26
[60] 웹사이트 お知らせ(全表示)- 2018年11月09日 彬子女王殿下に名誉博士学位を贈呈 https://www.kokushik[...]
[61] 웹사이트 瑶子女王殿下の記者会見の内容 - 宮内庁オフィシャルサイト 2003-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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